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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의 삶, 배우에서 바이오 대표까지…다양한 스펙트럼의 세계 배우, 무대 미술가, 연출가 등으로 살아온 인생이 하나의 프로젝트를 달성하기 위한 여정의 줄기
KBNS 뉴스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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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5.26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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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배우와 (주) 우리셀바이오  브랜드 /쓰임셀

한 사람의 인생 역정을 돌아보면 닮은 듯하면서도 모두 다른 모습과 방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잘났든 못났든 한 사람 한사람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한편의 드라마나 영화가 아닌 것이 없다. 그래서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인생에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지 모른다. 단순히 사람 앞에 나서기가 두려운 성격을 고쳐보고자 시도한 일이 인생 전부를 만들어버린 한 사람의 삶이 흥미롭다. 인테리어디자이너로 시작해 성우, 배우, 공연제작, 기획자, 무대미술가, 연출가, 오페라총감독까지 두루 두루 거치다가 결국 바이오회사의 대표가 되기까지 어느 누구보다 다양한 인생 스펙트럼을 이룬 이용도씨를 만났다.


Q. 먼저 간단한 프로필을 듣고 싶다 
- 대학에서 디자인과 미디어영상학을 전공하고 동국대학교 공연예술학과석사과정을 졸업하여 무대 인생이 시작됐다.


Q. 배우가 된 동기는 무엇인가?
- 어느 날 문득 남 앞에 서는 것이 쉽지 않은데다 목소리도 별로 좋지 않다는 자각에 빠질 즈음, 버스 안에서 온상수 PD의 라디오 인터뷰를 듣게 됐다. 그는 당시 배한성, 양지운 등 기라성 같은 성우들을 교육하면서 스피치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었다. 이에 무작정 KBS를 방문해서 그를 만났다. 그가 전문가를 키운다는 말에 작심하고 그의 문하생이 돼서 연기의 기초를 배우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후 어느날 친구가 민중극단 오디션을 보는데 같이 가자고 해서 친구 따라 갔다가 연기단원 오디션을 보게 됐다. 무용, 연기, 노래에 재능이 있는 배우를 선발하는 오디션에서 최종 7명 명단에 포함돼 본격적인 배우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아가씨와 건달들>, <올리버 트위스트, <캬바레>, 등 뮤지컬과 연극에 출연하면서 연기 기반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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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배우로 시작했지만 도중 다른 길에서 더 많은 활약을 했다던데
- 전공이 디자인이었던 만큼, 이런저런 잔재주가 많았다. 당시 공연 환경이 열악하다보니 저절로 무대 장치에도 관여하게 됐다. 폐자재를 뜯어 자르고 박고 칠하면서 비용 절감의 효과를 경험했다. 당시 무대 미술이 귀한 시절이라 이런 일이 입소문이 나면서 다른 극단에서도 세트 미술에 대한 의뢰가 쇄도했다. 이에 벽제에 셋트 제작센터를 만들어 스테이지아트센터를 만들기도 했으며 더 전문성을 갖추고자 한국공연예술아카데미에서 무대 미술을 공부했다. 목수, 디자인, 작화까지 1인 다역을 했다. 하지만 배우에 대한 열망이 꿈틀거렸다. 세트 디자이너, 제작자, 무대감독까지 하면서도 성취감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무대에 서는 선배님들이나 후배들을 볼때면 늘 내자신은 늘 우울했다. 


Q. 그러면서 다시 본격적인 공연예술 세계로 전향한 이야기가 궁금하다.
- 1991년 극단 [님비 곰비]를 창설하고 동인제 [11인의 아해들]을 조직했다. 그때 조광화(극작가), 박장열(연출가) 같은 실력 있는 동료들이 합세했다. 함세덕 작 해연(海燕)을 첫 무대에 올렸지만 흥행에 참패했고 동료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책임감을 가지고 대표를 맡아 이끌어갔다. 두 번째 작품으로 전래동화를 바탕으로 마당놀이 형식으로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형식으로 “둥개둥개 이야기 둥개 시리즈1 <호랑이와 도깨비 이야기>”를 무대에 올려 국제아동청소년연극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면서 오키나와 국제청소년연극 페스티벌에 참가하게 됐고 이어서 아동극으로 국내 최초로 해외 순회 공연하는 기염을 토했다. 국내에서도 아르코 극장에서 15일간 무료 대관을 해줘 연일 매진의 흥행을 이뤘다. 지상파 생방송 뉴스에 직접출연 어린이 가족 뮤지컬 ‘님비 곰비’ 대표 이용도로 소개돼 오랜 고생 끝에 낙이라는 달콤한 진리도 맛봤다. 당시 나이 스물여덟 살이었다. 이 결과는 그동안 맘고생 시켰던 부모님에게도 자식의 도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이후로도 “둥개 둥개 이야기 둥개 시리즈<콩쥐와 팥쥐엄마>, <십이지신>등 계속 만들어내며 연이어 수상하기도 했다. 또한 무대미술, 극단 대표, 연출, 기획 제작자 등 많은 역할로 종횡무진했다. 하지만 연기에 대한 열망을 죽지 않았다. 급기야 SBS방송국 선배 PD를 찾아가 딱 한번만 출연시켜달라 못하면 다시는 출연시켜달라는말 안하겠다 라는 말에  <토요미스테리 극장> 1회에 출연하면서 연기자로 인정받아 SBS특채 탈렌트로 종영할때까지 출연하게 됐고, 이후 주말극, 사극 등 30여 편의 작품에 출연했으며 연극, 영화, 방송, 뮤지컬 등을 총망라하며 쌓였던 연기 한을 풀었다. 특히 영화 <사랑하고 싶은 여자,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나에게 청룡영화상 미술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겨주기도했다.


Q. 다양한 삶의 이력에 바이오회사 대표까지 더해졌다. 이 또한 창작의 연계인가.
- 다양한 인생 경험과 역경은 삶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지금껏 걸어온 나의 이력의 중심은 창작이었다. 첨단 생명과학 바이오 사업에 뛰어든 배경은 2019년 첨단 재생 의료법이 통과되면서 생명과학에 대한 시스템을 만들고 싶은 욕구로 인해 시작됐다. 하지만 더 깊은 의도는 죽기전에 사회에 100억을 기부하는 것이 내인생에 마지막 목표였다. 첨단 바이오사업이 나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을것이란 기대감에 사업에 뛰어들었다. 남들은 예술가로 살아오다가 어떻게 전혀 다른분야의 생명과학 바이오를 매개로 하는 사업을 하냐고 물어볼때면, 결국 위대한 예술도 모방에 의해서 새로운 창작이 만들어 지듯, 과학도 이미 앞서 나온 과학을 바탕으로 데이터 값이 축적돼서 그걸 업데이트하고 새로운 과학이 발명되고 증명되듯 예술의 창작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과학자들의 창조성과 예술가의 창의성을 잘 조합하여 엄청난 시너지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바이오 사업의 대표역할을 맡아 잘 소화 해내고 시도하고자 하는 프로젝트 목표가 달성되면 다시 배우의 길로 돌아갈 것이다.


Q. 끝으로 ‘인간’ 이용도를 정의한다면.
- 그리 오랜 삶을 살아오진 않았지만 결코 짧지 않은 인생을 반추해 볼 때 제 삶은 ‘개척과 창조’라는 단어로 요약이 가능할 것입니다. 추상적 개념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삶의 개념으로 그 단어들은 존재하죠. 개척은 개혁의 의미를 동반하며, 아무도 가지 않은 황폐한 길이나 가기를 꺼려하는 험난한 길에 먼저 앞서 정성껏 길을 내고 숲을 만들어 누구나 편히 걷는 만인의 길이 되도록 사심 없이 열과 성을 다해 왔다는 것이고, 창조는 새로운 것을 향한 뜨거운 내재적 기운을 무대나 기타 예술 활동에 발산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아를 넓혀 제가 속한 집단의 공동이익이 창출될 수 있는 새로운 기구나 환경을 만들어 공동선을 지향하는 일에 결코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위대한 창조가는 아닐지언정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모두가 누려야 한다는 온화한 창작가, 창의가를 한마디로 정의 한다면 내 인생은 아티스트다. 다른 표현으로는 창작 크레이티브라고 할 수 있겠다. 늘 새로운 것을 창작하고 변화를 꿈꾸며 사업가, 배우, 무대미술가, 연출가, 아티스트로 살아온 것도 하나의 프로젝트를 달성하기 위한 여정의 줄기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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